탈레반 피랍 한국인 구출을 위한 특전사의 비밀 작전

2007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대한민국 국민 23명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중인 한국군을 7월 21일 정오까지 철수할 것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수감 중인 탈레반 수감자 전원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주변 우방국은 테러세력과의 무협상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7월 21일, 우리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고, 정부 대책반을 꾸려 현지에 급파하였다.


7월 22일,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동의 다산부대' 철수를 약속했지만 탈레반은 협상을 지속한다는 입장만 번복하였고, 같은 달 25일 첫 번째 인질을 살해하였다. 이후에도 협상은 계속되었으나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포로 석방 거부로 2번째 인질이 살해당한다.


↑ 동의 다산부대


그리고 8월 2일, 인질의 시신이 본국에 도착하였다.


8월 3일, 우리 정부는 탈레반과 직접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은 한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불만족을 표시하였고, 지속적인 협상 끝에 8월 28일 정부와 탈레반 간의 협상이 타결된다. 군철수, 기독교 선교단 파견 금지등 5개안에 합의함으로써, 9월 2일, 인질로 잡혀있던 한국인들이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한다.


여기에 대다수가 몰랐던 숨겨진 사실 하나가 여기에 있다.


07월 19일부터 9월까지 약 2개월 동안 평화적 협상만이 언론에 부각되었지만 사실 정부는 군사적 움직임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억류된 한국인 인질 구출을 위해 군사적 차원의 구상에 대비했고, 우리 군의 대테러 전문부대 정예요원 여러 명이 카불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던 것이다.



이 작전의 내막은 이렇다.

청와대 주관 'NSC(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인질들이 계속 살해될 경우 탈레반을 직접 공격하는 계획안을 수립한다.


피랍 사태 5일째인 7월 23일, 현지에 군사 협조단 단장으로 파견된 전인범 준장은 국제공조가 주 목적이었지만 사실 그의 파견은 이러한 작전 총괄을 책임질 경우도 염두해둔 것이었다.


작전의 추진을 위해 문영기 중령은 군사 협조단의 작전 총괄 장교의 소임을 맡아 아프간의 '국제안보지원군(ISAF)' 사령부에 파견됐다. 그는 ISAF를 통해 무장세력의 이동 경로 및 은거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 정부 현지 대책 본부에 제공하는 한편 ISAF가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펼치지 않도록 강력하게 ISAF에게 요구했다.



동시에 강경일 소령은 아프간에 파병됐던 다산부대 공병 장교로서 미군과 ISAF, 현지 협조단, 합참 등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임무수행을 위해 현지에서 항공전력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했다.


작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과 국제안보지원군(ISAF) 병력들이 외곽을 엄호하면 수송기로 급파된 특전사 대테러 전문 요원들이 억류 지역에 투입돼 인질을 구출한다는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만약 인질 전원 살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경우 특전사를 파견하여 '테러리스트'들을 섬멸하고, 추가적으로 특전사 1~2개 여단을 보내 현지 미군, 아프간 정부군, 국제안보지원군의 물자, 항공지원을 받으며 가즈니주 탈레반을 섬멸할 계획도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작전 과정의 경로를 인정하여, 문영기 중령과 강경일 소령을 비롯한 특전사 소속 장교 등 13명이 한국인 인질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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