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MILITARY 3분 매거진 2018. 9. 11. 11:24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3일 만에 우리 국군은 완전히 와해됐고, 그나마 남은 병력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국군의 군 상황과 전투 결과는 참담할 지경이었고, 미국에 비친 남한은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당시 미국은 낙동강 방어 전선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남한 정부 모르게 유엔군 철수 계획을 수립하는데 그것은 바로 'New Korea Plan' 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대만과 같은 경우로 남한의 국민들을 섬으로 이주시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는데, 대상지로는 「제주도, 일본의 사모아 섬, 서사모아 제도의 이름 없는 섬」 이렇게 3개의 섬이 후보지로 선정된다. 첫 번째 후보지였던 제주도는 식수 공급이 어려워 오래 버..
MAN/MILITARY 3분 매거진 2018. 9. 10. 07:00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1990년, 미국의 비밀 해제된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수많은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이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 중공군이 한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다. 1950년 10월 중순,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감행했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 중공군은 이 무렵 압록강을 넘어 첫 공세를 개시한다. 중공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던 UN군은 후퇴의 후퇴를 거듭한 끝에 38선 일대까지 밀리게 된다. UN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여차하면 또다시 낙동강 방..
MAN/MILITARY 3분 매거진 2018. 8. 13. 07:00
'말'이 인간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은 약 1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약 200년 전, 증기 기관으로 움직이는 열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보다 빠른 이동 수단이 없었을 만큼 오랜 기간 애용되었고, 그것은 군도 마찬가지였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제1차 대전 당시만 해도 전선 돌파의 주역으로 맹활약하였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기병여단 '스캇츠 그레이' 현재는 기계화 부대의 등장으로 전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산간오지의 산악부대 지원이나 의전 행사를 위해 말을 군용으로 사용하는 국가들이 많다. 하지만 말을 이용한 부대중 전투병과인 '기병대'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현재 기마 의장대를 운용하는 나라의 경우도 대부분 예전의 기병대를 모..
MAN/MILITARY 3분 매거진 2018. 7. 27. 07:00
1971년 2월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의 중심인 여의도에는 비행장이 존재했다. 여의도 비행장은 1958년, 김포공항으로 그 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인 국제공항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 여의도 비행장 사실 여의도 공항은 191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다 보니 항공 역사와 관련된 많은 비화가 담겨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항 개장 이듬해인 1917년 세계적인 곡예비행사인 '스미스(Art Smith)'가 곡예비행을 선보이기도 했고,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단발 쌍엽기 '금강호'를 타고 시범비행을 하기도 했다. 또한 해방 직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미 군정 당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 ..
MAN/MILITARY 3분 매거진 2018. 7. 12. 07:00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총 16개국에서 150만 명 이상이 참전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국가들이 전쟁 물자 및 의료를 지원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공식적으로 파병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의 주도 하에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극비리에 바닷속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 부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북한의 인민군에 끌려가 참전했다가 이후 다시 한국군으로 징집당하는 기구한 인생행로를 걸었던 한 일본인이 있었다. 바로 일본 미야기현 출신의 '후지이 히데토'가 그 주인공이다. 이 사연은 지난 1992년 6월 24일 일본 산케이 신문에 보도되었으며, 다음날 25일 경향신문에 실렸다. 대한민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