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군대에 공여한 대한민국 최초의 훈련기

1971년 2월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의 중심인 여의도에는 비행장이 존재했다. 여의도 비행장은 1958년, 김포공항으로 그 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인 국제공항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 여의도 비행장



사실 여의도 공항은 191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이다 보니 항공 역사와 관련된 많은 비화가 담겨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항 개장 이듬해인 1917년 세계적인 곡예비행사인 '스미스(Art Smith)'가 곡예비행을 선보이기도 했고,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단발 쌍엽기 '금강호'를 타고 시범비행을 하기도 했다. 또한 해방 직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미 군정 당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 대한민국 창공을 최초로 비행한 청년 비행사 안창남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보다 더 감격스러웠던 순간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40여 일 전인 1950년 5월 14일에 있었던 '건국기 헌납 명명식'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 공군이 10 기의 'T-6 훈련기'를 캐나다에서 도입하여 명명식을 가졌는데, 이것은 단순한 비행기의 도입 행사가 아닌 온 국민의 기대와 열망을 담고 있던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1949년 10월, 별도의 군으로 독립했지만 한국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L-4, L-5 연락기 20기가 전부였다.


↑ 연락기 : 요원의 이동이나 소량의 물자 운반을 책임지는 소형 항공기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 군사 고문단에 전력증강 요청을 했고, 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도 이에 동의하여 40기의 F-51 전투기를 비롯한 약간의 장비를 한국에 지원해 줄 것을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국군을 치안유지에나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던 미 정부는 이런 요구가 너무 과하다며 지원을 거절했다.


↑ 한국전쟁 이후 도입된 F-51 전투기


그러자 우리 정부는 "우리의 비행기는 우리의 힘으로 구입하자!"는 구호 아래 범국민적인 애국기 헌납 운동을 선언하고, 전투기 구입을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했는데,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참여로 목표액을 초과한 총 3억 5,000만 원의 성금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던 국민들은 어렵게 되찾은 자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든든한 국방력의 건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신생 독립국에서 모은 성금만으로 최신식 전투기를 살 수는 없었고, 또 유일한 무기 공급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도 판매를 금지하고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가 보유한 중고 'T-6 Texan' 10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기는 신생국의 하늘을 책임지라는 의미에서 '건국기'라고 명명되었고, 각각의 기체에 다음과 같이 별도의 기명이 부여되었다.


↑ 건국 1호기(교통1호), 건축 2호기(전북학도1호), 건국 3호기(전남학도1호), 건국 4호기(전매1호), 건국 5호기(충남1호), 건국 6호기(체신1호), 건국 7호기(국민1호), 건국 8호기(농민1호), 건국 9호기(전남1호), 건국 10호기(경북1호)


한마디로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성금을 모금한 국민의 애국심을 상징하기 위하여 명명된 성스러운 이름들이었다. 이처럼 고귀한 이름을 부여받은 건국기의 탄생에 온 국민이 감격하였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고, 비록 연습기에 불과했지만 '건국기'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이 발발하자 건국기들은 '연습기'에서 적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기'의 임무를 받고 당당히 출격했다. 그러나 연습기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많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으로 내려가 급조한 폭탄 투하 장치를 이용하거나 후방 탑승자가 손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방법으로 적 기갑부대를 공격하기도 했는데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다행히도 전쟁 발발 일주일 만에 미국이 F-51 전투기를 공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건국기는 연습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고, 종전 후인 1962년 12월 1일까지 조종사 588명을 양성해 냄으로써 한국 공군의 기틀을 다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대한민국의 T-50 고등 훈련기



이처럼 한국 공군의 연습기에는 국민들의 희망과 관계자들의 피와 눈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리 기술로 직접 만든 최신예 'T-50' 고등훈련기가 대신하고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