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기밀 문건에서 공개된 한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1990년, 미국의 비밀 해제된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수많은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이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 중공군이 한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다.



1950년 10월 중순,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감행했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


중공군은 이 무렵 압록강을 넘어 첫 공세를 개시한다. 중공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던 UN군은 후퇴의 후퇴를 거듭한 끝에 38선 일대까지 밀리게 된다. UN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여차하면 또다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UN군과 국군은 「평택-삼척에 이르는 37도선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때 미국 본토에서는 위험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중공의 참전 의도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진 이상,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완전히 철수한다"는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게 될 경우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수립, 약 백만 명의 한국인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우리 국군의 반발을 우려했던 미국은 한국 정부나 일선 야전 부대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37도선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던 우리 국군은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지난여름에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할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한 방어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금강 부근까지 밀릴 경우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찾아온다.

중공군은 우리 국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전열 재정비를 위해 서울에서 진격을 멈췄다. 이 시기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은 UN군과 국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승리할 수 있는 소규모 국지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계속된 패배와 그로 인한 후퇴로 곤두박질치고 있던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움직임이 둔화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고, 이를 '울프하운드' 작전으로 명명한다. 그런데...


수색에 가까운 소극적인 작전이었던 '울프하운드' 작전은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1951년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 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수원 부근에서 맞닥뜨린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 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한국전쟁 당시에 최고로 위험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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