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의 한국인이 태평양의 외딴섬에 이주 될 뻔한 사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3일 만에 우리 국군은 완전히 와해됐고, 그나마 남은 병력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국군의 군 상황과 전투 결과는 참담할 지경이었고, 미국에 비친 남한은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당시 미국은 낙동강 방어 전선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남한 정부 모르게 유엔군 철수 계획을 수립하는데 그것은 바로 'New Korea Plan' 이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대만과 같은 경우로 남한의 국민들을 섬으로 이주시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는데, 대상지로는 「제주도, 일본의 사모아 섬, 서사모아 제도의 이름 없는 섬 이렇게 3개의 섬이 후보지로 선정된다.


첫 번째 후보지였던 제주도는 식수 공급이 어려워 오래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대만의 섬처럼 거리가 충분치 않아 이후의 안보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두 번째 후보지로 일본의 '사모아섬'의 경우에도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는데, 한국의 반일감정 (특히 수뇌부), 일본 내 우익들의 테러 가능성, 재일교포 문제로 인한 한일 정부 간 갈등 등 한국 정부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이 또한 기각된다.


결국 남게 된 '서사모아 제도'의 이름 없는 섬이 가장 적합할 것으로 판단, 이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따듯한 남쪽나라에 원주민은 무시한 채 민간인 포함 수십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 정도 수용 가능한 시설을 두는 것, 이것이 미국의 'New Korea Plan'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미국 정부의 계획에 비협조적인 미군 장성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윌튼 워커' 장군이었다.



워커 장군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류였던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을 독려하고,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라는 연설과 함께 'Stand or die(버티거나 아니면 죽거나)'라는 엄중한 낙동강 사수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워커 장군의 지휘 아래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유엔군과 국군은 이리저리 낙동강 전선의 격전지를 옮겨가며 전투를 벌였고, 다행히 후속 부대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후 전황이 버틸만한 상황이 되자, 유엔군 철수를 계획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큰 전환점인 인천상륙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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