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축제 '월드컵'이 불러온 100시간 전쟁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역사적으로 보면 대부분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반대로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끼리는 사이가 나쁠 일도 없고, 혹시 사이가 나빠진다 하여도 전쟁까지 벌어지기는 사실 힘들다. 예를 들어 쿠바가 한때 우리나라의 적성국이었지만 적대국이라 하기에 곤란하였던 이유도 사실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몰려있는 중미의 경우만 해도 역사적,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중에서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국가들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축구 때문이었다.



축구전쟁이라는 명칭처럼 축구가 양국간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면에는 전쟁이 발발할 수 밖에 없었던 내재적 요인이 축적되어 폭발할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던 상태였다.


1970년, 제9회 멕시코 월드컵 중미예선에서 두 나라가 맞서게 되었다.

홈&어웨이 방식으로 1969년 6월 8일, 온두라스에서 경기가 먼저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는 일방적으로 응원을 받은 홈팀 온두라스가 1-0으로 승리하였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이번에는 장소를 엘살바도르로 옮겨 2차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접전 끝에 이번에는 홈코트의 이점을 얻은 엘살바도로가 3-0으로 승리하여 승패를 원점으로 돌려 버렸다.


당시에 경기가 어느 정도 과열되었는지 경기를 중계하였던 온두라스 해설진이 "엘살바도르에게 죽음을~, 엘살바로르에게 신의 저주를~" 이라는 부적절한 멘트를 쉴새없이 외쳐됐다.


이렇듯 과열된 경기와 관중들의 적대감으로 가득 찼던 경기가 끝난 후, 관중석에서는 흥분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관중 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원정을 와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온두라스의 응원단은 일방적으로 집단 린치를 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국경 밖으로 추방당하는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이러한 소식이 온두라스에 전해지자 온두라스 전역에선 거주하고 있던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무차별적 보복 테러행위가 발생하였다.



그동안 불편하였던 관계에 있다가 축구 경기로 감정대립이 격해진 이 두 국가는 6월 16일 상호 간에 통상교역 금지를 단행하고, 이에 대하여 6월 18일 엘살바도르는 세계 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제소해 버리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6월 23일 양국은 단교를 단행하였다. 그야말로 다혈질의 라틴아메리카 국민들답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한편 승패가 1승 1패로 동일하여 이미 축구를 넘어 폭력과 외교적 마찰을 불러왔을 만큼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양국 간의 재경기가 확정되자 국제축구연맹은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 번째 경기는 제3국인 멕시코에서 벌이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단교 직후인 6월 27일, 제3의 장소인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진 최종전은 양측을 응원하는 관중들보다 삼엄히 경비에 나선 멕시코 경찰들이 더 많았던 경기로 기록되었는데, 경기 내용은 안 봐도 비디오인 것처럼 운동이 아닌 집단 격투기 같은 형태로 진행되어 말 그대로 선수들이 피를 흘리는 혈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연장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를 거두어 결말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경기 결과는 양국 간의 감정을 풀기는 커녕 더욱 악화시켜 계속되는 외교적 비난과 자국에 있는 상대국 국민들에 대한 테러로 이어졌다. 특히 온두라스 정부의 방관 하에 상대적으로 온두라스에 자국 국민이 많았던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피해가 늘어났다.


그러자 분노한 엘살바도르는 7월 13일 새벽, 온두라스에 선전포고 후 포병부대의 포격을 시작으로 전쟁을 개시하였다.



엘살바도르군의 주력이 온두라스 동서 요충지인 엘포이와 아마킬로를 함락시키고 공군은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와 여러 도시를 폭격하였다. 기습을 받은 온두라스는 반격을 하였지만 초전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여 2천 여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하였다.



결국 이를 방관할 수 없던 미국의 중재로 온두라스는 사실상 패전을 당한 상태로 휴전에 이르게 되어 100시간만에 전쟁이 종료되었다.



이 두 국가 간의 앙금은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1980년 10월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벌어진 평화조약으로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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