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사령관이 조선의 스파이로 오해받은 사연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핵무기였던 '리틀 보이'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 580m 지점에서 폭발했다.



원폭이 터지는 순간 일본 본토는 폐허가 됐고, 제국을 꿈꾸던 그 나라는 그렇게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연합군은 일본이 저질렀던 무자비하고 참혹한 전쟁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전범 재판을 열었다.

악명 높은 A급 전범들이 줄줄이 사형을 선고받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불기소처분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무타구치 렌야'...



그는 일본군 소속의 장성으로 중일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는데, 수많은 전쟁범죄를 지시, 가담했던 그가 어떻게 불기소처분을 받고 멀쩡히 살아나갈 수 있었을까?


무타구치 렌야는 1888년, 규슈 북서부에 있는 '사가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36년 4월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한 '노구교 사건' 때 연대장으로 참여했다.



여기서부터 그의 본격적인 진가가 발휘된다.

당시 베이징 근처의 일본군이 야간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총성이 울리자 그는 전 병력을 집합시켰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중국군의 습격이라고 생각한 그는 비상을 걸고 중국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하는데, 사실 문제의 실종자는 용변을 보느라 집합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중국과 맞붙을 생각이 그득했던 일본 군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야흐로 중일전쟁의 서막이었다. 어쩌면 일부 지역의 작은 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투가 무타쿠치의 이 같은 적극적인 태도로 인해 중일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어쨌든 전쟁은 군인의 승진을 빠르게 한다. 7년 뒤 그는 중장을 달고 버마 주둔 일본군 15군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44년 3월부터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시작된 '임팔 작전'을 맡게 되었다.



임팔 작전에서 무타구치는 연합군을 피해 정글과 높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는 산악 지대를 통과해 임팔 지역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에 대해 당시 일본 군부와 제15군의 참모 등 많은 이들이 물자 운송에 어려움이 있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기여이 그는 작전을 예상대로 진행시켰다.


그가 진격하고자 하는 땅은 지구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울창한 정글 지대였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정글 한복판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모두가 우려하던 군수품 운송수단으로 현지의 소를 이용하는 통찰력(?)을 발휘했다.



"짐을 운반한 후 운반이 끝나면 식량으로도 이용한다"는 과거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할 때 즐겨 사용하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정글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혹독했다. 보급품을 지고 있던 소들은 얼마 되지 않아 절반이 계곡으로 떨어지거나 물에 휩쓸려 죽었다. 탄약과 식량이 절반이나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예상과는 달리 연합군의 저항도 거셌다.


연료·탄약·식품·약품 모두가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80%의 병력이 정글 속에서 굶주리다 죽었다.



이에 무타구치 렌야 중장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령을 내린다. "일본인은 원래 초식이다. 주위의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라."


작전은 명백히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타구치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치 않고 작전을 강행했다. 다른 사단장들의 반대와 불만이 점차 커졌다.



급기야 당시 일본군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항명사태까지 일어났다. 제31사단 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퇴각해버린 것이다.


이에 분노(?)한 무타구치 렌야는 또 하나의 길이 남을 명령을 내린다.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총 없이 맨손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다. 무기가 없으면 주먹으로 때리고 입으로 물어뜯어라"


이처럼 무타구치의 천재적인(?) 지휘와 판단 능력 덕분에 일본군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손실됐다. 심지어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결국 무타구치의 밀어붙이기식 작전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6만 5천 명의 병사 중 겨우 1만 5천 명이 살아돌아온 대실패였다.


임팔 작전 실패 후 무타구치는 제15군사령관에서 파면된 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나, 1945년 다시 소집되어 '육군예과사관학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무타구치 역시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임팔 작전에서의 실패 등 오히려 일본을 위해 공을 세우지 못하고, 태평양 전쟁의 종식을 앞당겼다는 것이 참작되어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 실패에 대한 반성과 패전의 부담감 때문에 1960년까지 공식적인 자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2년, 임팔 작전 당시 영국군 중위였던 '파커'로부터 "임팔 작전은 좋은 발상이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무타구치는 "나의 작전은 정당했다. 부하 때문에 실패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66년 사망할 때 가족에게 유언을 남겨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팸플릿을 장례식장에서 배포하도록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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