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었던 그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 이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총 16개국에서 150만 명 이상이 참전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국가들이 전쟁 물자 및 의료를 지원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공식적으로 파병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의 주도 하에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극비리에 바닷속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 부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북한의 인민군에 끌려가 참전했다가 이후 다시 한국군으로 징집당하는 기구한 인생행로를 걸었던 한 일본인이 있었다. 바로 일본 미야기현 출신의 '후지이 히데토'가 그 주인공이다.


이 사연은 지난 1992년 6월 24일 일본 산케이 신문에 보도되었으며, 다음날 25일 경향신문에 실렸다.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 1945년, 일본으로 돌아갈 길을 잃은 후지이는 서울의 한 창고회사에서 일하며, 어머니와 3명의 형제들을 부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고, 한국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 된 그해 8월, 전차를 타고 종로를 지나던 후지이는 북한 인민군에 발각되어 수백 명의 다른 청년들과 함께 평안남도 원리의 '인민군 제5야영훈련소'에 끌려간다.


그 곳에서 후지이는 이름을 묻는 말에 한국식 이름인 '박념인'이라 대답했고, 이로 인해 본격적인 인민군 생활이 시작됐다.



인민군 '운수제4대대'의 수송병이 된 그는 소련제 대형 트럭으로 고사포와 포탄을 실어 날랐다.


이후 인민군 19사단 '정찰대대'에 배치된 후지이는 영국 보병부대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채 낙오됐고, 남천에서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에서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밝혔으나 그의 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거제도에서 3년 가까이 포로생활을 하던 후지이는 1953년 6월 반공포로석방으로 가까스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던 전후 한국에서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같은 해 가을,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향하던 중 병역 기피자 단속반에 붙잡혔고, 이번에는 육군 제2보충대에 편입됐다.



1년 가까이 국군으로 복무하던 후지이는 이듬해 1954년 11월 '애국반공청년지원병'에 대한 특별 휴가를 받게 된다. 휴가를 받아 서울로 향한 후 이를 기회로 한국 외무부에 귀국 신청을 한다.


또다시 1년이 흘렀고, 1955년 10월에야 귀국 신청이 허가됐다는 통지를 받고 제대를 할 수 있었다.

1956년 2월 5일, 그는 마침내 오사카 항을 통해 일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지 10년 6개월 만이었다.



한국인 행세로 인민군에 끌려가 6.25 전쟁을 겪고 국군으로까지 복무했던 후지이... '후지이 히데토'의 사연이 공개되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