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미군을 철수시킨 필리핀의 최후

1991년, 당시 필리핀에서는 반미와 민족주의 열풍이 극심했고,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냐... 우리의 주권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라는 구호와 함께 미군 철수를 외치는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1992년, 필리핀 의회에서 미군 주둔 협정 연장법안이 단 한 표 차이로 부결되면서 미군은 그들의 요구대로 필리핀을 떠나기로 한다.



1992년 11월 24일, 미 해군 제7함대가 필리핀 '수비크만'에서 성조기를 내리고, 전면 철수를 시작했다. 곧이어 필리핀 전역에 있는 모든 병력과 물자, 장비들이 필리핀을 떠났다.


이후 남중국해에 미군 기지가 없어지자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영해법을 선포, 기존 중국 해상 영역 87만 Km²의 무려 3배가 넘는 300만 Km²에 달하는 필리핀의 해상 영역을 중국의 영해로 선포했다.


여기에 더해 필리핀 영해에 속한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스카보러 섬'에 대한 사적인 연고권을 들먹이며,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중국 어선들과 해군 함정들이 수시로 영해를 침범했다.



결국 중국은 해군 함정을 동원하여 이 2섬을 강제 점거하고 자국 영토로 편입해 버린다.


스프래틀리 제도 산호섬에 계양 된 중국 깃발


↑ 또 다른 하나의 섬인 스카보러 섬에 게양된 오성홍기


이러한 중국에 대응하기에는 미군 없는 필리핀의 해군력은 그야말로 초라한 수준이었다.


↑ 미군이 철수한 그해 필리핀의 외국자본 60%가 빠져나갔고, 그나마 근근이 버티던 경제 또한 완전히 침몰해 버렸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2013년 6월, 필리핀 해군이 자국의 영해를 침범한 대만 어선에 실탄 사격을 가했고, 그 결과 대만 어민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건 이후 당사자인 대만은 물론이고 영해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까지 나서 필리핀을 압박했다.




대만이 자국 어민 피격 사망 사건이 발생한 남중국해 주변 해역에서 군사 훈련을 하기로 하자 필리핀이 바짝 긴장하며 경계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이러한 압박에 마침내 필리핀 정부의 굴욕적인 사과가 이어졌다.


"우리는 대만이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선은 우리가 사과하고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중국과 대만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자"



하지만! 당시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은 필리핀 측이 타이베이 주재 대사를 통해 유감과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성의가 부족하다."면서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대만 정부는 이날 오후 6시까지를 2차 시한으로 정하고, 이때까지 더 공식적이고 성의 있는 사과와 배상 문제에 대한 태도 표명이 없으면 2차 제재 방안을 공개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필리핀은 이러한 위협에 맞서 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국제사회에 중국과 대만의 영해 침범의 부당함을 알리고, 유엔에 제소하기까지 했지만 결과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 피살 대만 어민 유족에게 사과하는 필리핀 대통령 특사


"영토를 침범한 적을 발포한 영웅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국이 힘이 없다는 현실 때문에 먼저 사과하고 배상을 해야 하는 굴종적인 모습의 필리핀... 만약 적이 침범한다면 무자비하게 짓밟힐 운명을 가진 저 필리핀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배우기 바란다!"

- 이스라엘의 일간지 -


"밀려오는 중국 함대에 맞서 아무런 무기도 없이 홀로 필리핀 국기를 흔들며 자주 의식을 고취시켜 격려하는 것 말고 필리핀이 할 수 있는게 과연 무엇일까?"

- 중국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인도의 일간지 사설 -


↑ 필리핀 수비크만에 있었던 미 제7함대의 위용, 당시 그 누구도 필리핀 영해를 넘보지 못했다.



이후 미군의 필리핀 재 주둔을 허용한 양국 간의 협정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통해 필리핀은 다시 한번 미군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