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무려 300년간 복어 식용을 금지한 이유

"그렇게 빨리 죽고 싶으면 조선에 건너가서 싸우다 죽어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쟁을 일으킨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발대발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조선을 공격하러 떠나기도 전에 죽는 사무라이와 병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낱 생선에 지나지 않는 복어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해인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전국에서 끌어모은 16만 명의 병력을 '시모노세키' 항구에 집결시켰다.


일본열도 구석구석에서 사무라이들이 병사를 이끌고 이 항구도시로 몰려왔는데, 그중에는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 출신들도 많았다.



이들은 시모노세키에서 맛있는 생선, 복어를 처음으로 맛봤다. 그러면서 복어에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는 내장까지도 멋모르고 끓여 먹었다. 산골 출신의 병력들이 복어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시모노세키는 지금도 일본에서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도 복어가 많기로 유명했다.



히데요시가 화를 낸 이유 역시 이렇게 함부로 복어를 먹다가 죽는 병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앞두고 병력 손실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장병이 죽었으니 자칫 조선 출병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마침내 복어 금식령을 내린다. 글자를 모르는 병사를 위해 복어 그림을 그려 넣고 복어를 먹으면 벌한다는 말뚝을 곳곳에 세웠다. 그 덕분에 복어를 잘못 먹고 죽는 사무라이들은 없어졌지만 그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무려 300년 동안이나 복어를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됐다.



복어 금식령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지속됐는데, 전쟁이 잦은 일본에서 자칫 복어를 먹다 사무라이들이 사망하면 전력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영주들이 계속 복어를 먹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끝없이 억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위로는 영주인 '다이묘'에서부터 아래로는 하급 무사인 사무라이까지 몰래 복어를 먹다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주슈'라는 곳의 영주가 복어를 먹다가 죽었는데, 이 사실을 안 막부에서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영주가 복어 금식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하사했던 토지를 모두 몰수했고, 녹봉을 다시 거둬들인 것은 물론 자식들을 상류층의 신분을 빼앗아 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사무라이들은 복어 먹는 것을 수치로까지 여겼다. 명분은 자신의 목숨은 주군을 위해 바친 것인데 전쟁터가 아니라 복어를 잘못 먹다가 중독이 돼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복어를 먹지 말라고 다그쳤고, 1882년 일본 정부는 심지어 "복어를 먹으면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는 법령까지 만들었다.


처음에는 병력 손실을 이유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국민의 안전을 이유로 복어를 못 먹게 했지만, 맹목적인 금지가 원천적 욕구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렸던 복어 금식령이 풀린 것은 꼭 300년 후인 1892년으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서였다.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를 방문했을 때, '춘범루'라는 여관에 머물렀는데 마침 바다에 거센 폭풍우가 불었다.


배들이 며칠 동안 출항을 하지 못해 싱싱한 생선이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여관 주인이 금지된 생선인 복어를 요리해 총리에게 대접했고, 복어를 맛보고 감탄한 이토 히로부미가 춘범루에서는 특별히 복어를 요리해 팔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춘범루를 공식 복어 요릿집 1호로 꼽는 이유다.


춘범루



이처럼 일본의 복어 금식과 해금이 모두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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