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용기가 한국전쟁에 얼음을 투하시킨 이유

전투의 승패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이고 소소한 것에서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식량과 물이다. 평상시에는 언제든지 구할 수 있기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공급이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전황을 좌우하는 치명적 요소가 될 수 있다.



6·25 전쟁 때도 그랬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우리는 물 부족 국가가 아니었다. 우물이나 계곡물을 포함해 어디서나 쉽게 마실 물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치열한 고지에서라면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다부동 전투'는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마를 한여름 8월에 시작됐다. 다부동 전투에서는 식량도 모자랐지만, 특히 물 부족으로 고생이 많았다.


병사들은 갈증을 참지 못해 탄통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 논물을 퍼 담아 마셨고, 이 과정에서 자칫 적군의 저격에 희생되기도 했다.



혓바닥이 마를 정도로 목이 탄 병사는 심지어 바위틈에 고인 핏물을 떠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물로 인한 고통은 장비와 보급이 상대적으로 나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게는 식수용 정화제인 '할라존'이 지급됐지만 문제는 이 정화제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제조한 것이었고, 5년이 지난 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7월과 8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웠다. 고지마다 물이 부족했다. 심한 갈증으로 고통받는 병사들은 논의 물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마셨다. 인분이 널려 있는 논물이다. 오염된 물을 마시고 부대 전체가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다."

- 한국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기록한 내용 中


한편 미군 제1기병 사단에 편입되어 있던 영국군 제27여단 예하의 한 중대가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중대는 적에게 완전히 포위돼 고립된 상태에서 며칠 동안을 싸웠다.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산꼭대기에서는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었고, 중대원 전체가 갈증 때문에 목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물을 마시지 못하니 전투력은 급속히 떨어졌으며, 전투 의지마저 상실할 지경이었다.



보급을 담당한 미군이 탄약·식량과 함께 공중에서 물을 투하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물을 자루에 담아 공중에서 투하하면 자루가 찢어지면서 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졌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플라스틱 상자에도 담아보고 드럼통에도 담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 무게와 낙하 속도, 투하 높이 때문에 드럼통에 넣어도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끝에 아이디어가 나왔다. 물 대신 얼음을 투하하자는 것이었다.



보급품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얼음 용기가 깨지더라도 흩어진 얼음을 주워 담으면 식수로 마실 수 있으니 그만큼 작전 성공 가능성도 컸다.


마침 당시 미 8군이 대구에 있는 제빙공장을 인수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에게 매일 얼음을 공급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 얼음을 가져다 얼음을 공중 투하한 결과 작전은 예상대로 성공했다.



용기가 깨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얼음은 물처럼 유동적이지 않아 낙하지점에 비교적 정확하게 투하할 수 있었다. 영국군 중대는 마침내 충분한 식수를 공급받으며 싸웠고 아군의 지원을 얻어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얼음 공수 작전은 평소에 느끼지 못하지만 전투 중에는 가장 기초적인 보급품인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군 지원에 대한 신뢰가 전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포위된 상태에서 마실 물조차 떨어졌지만 아군의 공중 보급력을 믿을 수 있었기에 전의를 잃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얼음 공수 작전을 담당한 병참 장교 '마커스 쿠퍼' 중령이 남긴 말이다.



"병사들의 먹거리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병사들이 먹는 음식을 개선해준다면 병사들은 전선에서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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