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원폭이 타깃 1호였던 '교토'를 피해 간 이유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끝이난다. 핵실험 성공은 즉각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트루먼은 그 내용을 숨긴 채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예상대로 일본 군부가 이를 거부하자 트루먼은 일본에 대한 원폭 공격 계획을 승인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원폭 공격을 계획하고, 핵 공격이 가장 효과적일 것 같은 도시 4곳(교토, 히로시마, 니가타, 고쿠라)을 선정한다.



핵 공격의 타깃이 된 도시의 기준은

1. 도시의 면적이 지름 3마일(4.82km) 이상의 큰 도시이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2. 원폭 투하 시 효과적인 손해를 입힐 수 있는 도시를 최우선으로 한다.

3. 여태까지 폭격을 당하지 않은 도시를 기준으로 한다.


여기서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충족했지만, 세 번째 조건에는 맞지 않았다. 당시 도쿄는 대규모 '네이팜 탄' 폭격으로 이미 폐허가 된 상태여서 더 이상의 공격은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네이팜 탄 : 폭발 시 섭씨 3,000도의 열을 발생시켜 반경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무기이다.)



이렇게 도쿄를 제외한 4개의 도시에서 고민하던 미군은 가장 먼저 '교토시'를 첫 후보지로 거론하게 된다. 교토는 인구 100만을 넘는 대도시였으며, 수많은 피난민과 작은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적합한 목표 지점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지 못한 반대 세력이 나타난다. 바로 미국 국방성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었다.



그는 1893년 결혼식을 올린 뒤 신혼여행으로 일본의 교토를 방문했는데, 당시 그곳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일본인들의 친절함에 매료되어 교토만은 전쟁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미군은 '헨리 스팀슨'장관의 주장에 따라 교토 폭격은 일본의 정신을 건드리는 행위이고, 자칫 민심이 흉흉해져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원폭 대상 목록에서 '교토'를 제외한다.


그리고 남은 도시 중 고민하던 미군은 결국 '히로시마''고쿠라'를 원폭 대상 도시로 선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군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투하하고, 8월 9일 다음 목표인 고쿠라에 '팻맨'을 투하하기 위해 폭격기를 띄운다.



하지만 고쿠라시에 도착한 미군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안개와 연기로 인해 고쿠라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연료까지 떨어진 미군의 폭격기는 차선책으로 '나가사키'로 향했고, 그곳에 팻맨을 투하 하게 된다.



이로써 8월 15일. 일본의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동시에 '대한민국'은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만약 '헨리 스팀슨' 장관이 교토로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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