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

1932년 11월 중앙일보 기사에는 짧은 몇 마디의 기사가 개재된다.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 취조중 유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이상한 노인"


일본은 이상하게도 이 기사에 대한 내용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얼마 뒤 중국 다롄 항구에서 체포되어 죽은 노인이 '이회영'이라는 인물임이 드러났다.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유력 양반 가문의 자재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왕조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 집안 이였으며, 임진왜란 이래 병조판서 영의정 등을 지낸 백사 이항복 또한 이회영의 선조였다.


↑ 우당 이회영


당시 이회영은 개화 사상을 접하고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목도한 뒤 봉건적 구도와 모순을 타파하고자 마음먹었으며, 그 스스로 먼저 실천에 옮겼다. 집안의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대우해주었고, 그들이 성인이 되면 모두 평민으로 풀어주었다.


그러던 중 1910년, 조선의 국권이 강탈당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식민통치를 당한다. 이때 이회영은 가문을 설득해 모든 재산을 처분한 후 식솔들을 데리고 머나먼 만주 벌판으로 떠나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로 한다.



조선 3대 부자에 들 만큼 유복했던 이회영의 가문은 인삼밭, 각종 논밭에 쌀 3만석, 집안의 각종 고서, 골동품 등까지 모두 처분했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돈이 오늘날의 가치로 따지면 약 60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만주로 떠나온 이회영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 재산 모두를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쏟아붓는다. (훗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활약으로 조선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다.)



그러나 이회영의 가문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군에게 잡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일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실종되었다. 심지어 둘째 이석영은 거리를 헤매다 굶어죽었다.



유력한 가문에서 끼니 걱정 안하고 살던 이들이 차가운 만주 벌판의 칼바람 앞에서 며칠을 굶으며 아사 직전에서 기사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회영은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위와 권력을 놓고 서로 다툴 것이라 여겨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임시정부 설립 초기에는 많은 분규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회영은 1932년, 중국 국민당을 찾아 교섭하여 무기와 자금 등의 지원을 약속받고,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할 작전을 계획하며 근거지를 중국 다롄으로 옮기려고 구상한다. 그러나 항구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되고 이회영을 체포한 일본은 65세의 노인을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문을 가한다.



결국 이회영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사망하고 말았으며, 사망 직후 옮겨지는 모습을 본 목격자에 의하면 그의 온 몸과 옷은 엄청난 피투성이였다고 한다.


일본군이 복잡한 선실 내에서 정확히 이회영을 확인해 체포한 것에 의구심을 느끼던 청년동맹 단원들은 이회영이 상하이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 이규서와 연충렬이란 사람인 것을 알아내 그들이 밀고를 한 것을 확인하고 처참히 처단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은 패망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이회영의 일가는 마침내 돌아왔다. 만주로 떠날 때 60여명이었던 일가는 20여명으로 줄어있었으며, 그들은 빈털터리였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회영에게는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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